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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기획안이 왜 항상 현장에서는 실패할까?: "욕망하는 기획자와 보이지 않는 고릴라"

📑 목차

    나는 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획했을까?

    마케터이자 기획자로 일하면서 가장 뼈아픈 순간은, 밤을 새워 만든 완벽한 논리의 기획안이 클라이언트나 소비자에게 처참하게 외면받을 때입니다. 

     

    최근 저도 야심 차게 준비한 프로모션 기획이 기대 이하의 성과를 거두며 깊은 슬럼프에 빠졌었습니다. 

     

    데이터는 정확했고, 트렌드 분석도 철저했으며, 디자인조차 흠잡을 데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소비자는 왜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까?"라는 자책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산 부족이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하지만 실패가 반복되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외부 환경이 아니라, 기획을 하는 저의 '시선'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요. 

     

    저는 소비자를 분석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제 머릿속에 있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유리한 데이터만 골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선택적 지각'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무 현장에서 제가 그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보고 싶은 것(우리 제품의 장점)에 집중하느라, 정작 봐야 할 것(소비자의 진짜 욕망)을 놓치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의 이 좁은 시야를 깨트려 줄 강렬한 제목의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욕망하는 기획자와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상징한 일러스트
    욕망하는 기획자와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상징한 일러스트

    ‘보이지 않는 고릴라’가 내 기획서에도 숨어 있다

    이규철 저자의 "욕망하는 기획자와 보이지 않는 고릴라" 를 집어 든 이유는, 심리학계의 가장 유명한 실험 중 하나인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을 마케팅 기획과 연결했다는 점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농구공 패스 횟수를 세라는 과제를 받으면, 화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고릴라를 전혀 인지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 실험 이야기를 마케팅에 대입해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매출'이라는 패스 횟수를 세느라, 정작 시장을 유유히 지나가는 '고릴라(소비자의 변화나 치명적 결함)'를 못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이 뇌리에 박히자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기획 관련 도서들이 '보고서 잘 쓰는 법', '기획의 툴(Tool)' 같은 기술적인 면에 치중하는 반면, 이 책은 기획자의 '인식 체계'와 '태도'를 파고든다는 점이 기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스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눈'이 어두워져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베테랑 기획자로서, 우리가 흔히 범하는 '전문가의 오류'와 '지식의 저주'를 짚어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내 기획서 안에 숨어 있지만, 나만 보지 못하고 있는 그 거대한 고릴라를 찾기 위해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획자가 놓치고 있던 3가지 욕망의 메커니즘

    이 책은 단순히 '시야를 넓혀라'라고 훈계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의 인지적 한계와 욕망의 구조를 통해 기획자가 가져야 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제가 실무에 적용하기 위해 재해석한 3가지 핵심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는 기획자의 숙명적 질병이다. 책의 제목과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집중하는 대상 이외의 것은 뇌에서 아예 정보를 삭제해 버립니다. 

     

    기획자인 제가 '제품의 스펙'에 집중하면, 소비자가 느끼는 '사용의 불편함'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 뇌의 구조적 한계임을 지적합니다. 

     

    따라서 유능한 기획자란 자신이 모든 것을 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의도적으로 시선을 분산시키거나 제3자의 시각을 빌려오는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를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기획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태도"라고 정의했습니다.

     

    확신에 차서 쓴 기획서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하며 쓴 기획서가 결국 고릴라를 발견해 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기획은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소비자의 니즈(Needs)를 파악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니즈와 욕망(Desire)을 엄격히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니즈는 '배가 고프다'는 결핍의 상태지만, 욕망은 '성수동 핫플레이스에서 브런치를 먹고 싶다'는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지향점입니다. 

     

    기획자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도시락을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도시락을 먹음으로써 소비자가 얻게 될 '이미지'와 '만족감'이라는 욕망을 건드려야 합니다. 

     

    저자는 겉으로 드러난 논리적인 이유 뒤에 숨은,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욕망을 읽어내는 것이 진짜 기획이라고 말합니다. 

     

    제 기획서들이 밋밋했던 이유는 바로 이 '욕망의 뇌관'을 건드리지 않고, 기능적인 '니즈'만 나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프레임(Frame)'을 바꾸면 쓰레기도 예술이 된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떤 맥락(Context)에 놓느냐에 따라 가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책에서는 뒤샹의 '변기'를 예로 들며 프레이밍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화장실에 있으면 오물 처리기지만, 미술관에 놓이면 현대 미술의 걸작이 됩니다. 

     

    마케팅 기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제품을 '가성비 좋은 소모품'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있었던 건, 경쟁사가 아니라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기획자의 역할은 제품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제품이 놓일 '무대'를 바꿔주는 것입니다. 

     

    소비자가 우리 브랜드를 볼 때 어떤 안경을 쓰고 보게 할 것인가, 그 프레임을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고릴라를 발견한 기획자의 특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전 적용에 있어 다소 아쉬웠던 점

    책이 주는 통찰은 매우 날카롭지만, 모든 비즈니스 서적이 그렇듯 독자로서 느낀 아쉬움과 한계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당장의 성과'를 내야 하는 실무자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구체적인 방법론(How-to)의 부재'입니다.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히지 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는 메시지는 철학적으로 옳지만, 막상 출근해서 모니터 앞에 앉았을 때 "그래서 지금 당장 엑셀에 뭘 적어야 하지?"라는 질문에는 명쾌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양한 심리학 실험과 사례가 제시되지만, 이를 실제 비즈니스 기획 단계(시장조사, 타겟팅, 포지셔닝 등)에 스텝별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매뉴얼적인 요소는 부족합니다.

     

    인사이트는 풍부하지만, 이를 실행 계획(Action Plan)으로 변환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사례의 일부가 다소 '고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케팅과 기획의 트렌드는 AI와 빅데이터의 등장으로 급변하고 있는데, 책에서 다루는 예시들은 전통적인 오프라인 마케팅이나 고전적인 경영 사례에 치중된 경향이 있습니다.

     

    디지털 마케팅 환경에서 알고리즘에 의해 확증 편향이 더 심해지는 요즘, 온라인 환경에서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에 대한 최신 논의가 더해졌다면 훨씬 더 완벽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획자로 거듭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하는 기획자와 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기술과 데이터 만능주의에 빠진 기획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수작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기획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문서를 꾸미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편향된 본성과 싸우며 진실을 찾아가는 치열한 심리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인지'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책에서 배운 '무주의 맹시' 개념을 경계하며, 저는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기획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전제 조건들이 사실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는지, 우리 팀이 놓치고 있는 '고릴라'는 무엇인지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점검하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책의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실제 제가 실패했던 과거의 기획안을 다시 꺼내어 '고릴라 찾기' 관점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뜯어고쳐 보는 과정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죽어있던 기획안을 심폐 소생하는 '리프레이밍(Reframing)'의 구체적인 예시가 궁금하시다면 다음 포스팅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